서로마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후에도 로마의 이름을 지켜낸 제국이 있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수많은 침략과 내부 혼란 속에서도 천 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낸 예외적인 국가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비잔티움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핵심 동력과 문화적 유산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엇갈린 운명의 동로마와 서로마
4세기 말 로마 제국은 외부의 침입과 내부의 균열이라는 이중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라인강과 다뉴브강 북쪽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훈족의 압박을 피해 대거 로마 영토로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라 제국 내부로 편입되기를 요구하는 집단이었으며 로마는 이를 통제할 행정적·군사적 역량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은 더 이상 단일한 정치 체제로 유지되기 어려웠고 결국 395년을 기점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분열 이후 급속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황제권은 약화되었고 중앙 정부는 지방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군대는 자국민 병사보다 게르만 용병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이는 군사적 충성심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세금 징수 체계가 무너지고 도시가 쇠락하면서 제국을 유지할 기반이 붕괴되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영원한 도시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게르만족에게 약탈당했고 476년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고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이 도시는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동로마는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한 행정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고대 도시 문화가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국가 운영의 연속성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유일한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습니다. 황제는 로마 황제이자 크리스트교 세계의 최고 보호자로 군림했으며 서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조차도 겉으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독자적인 정치·문화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라는 권위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며 붕괴의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고대 국가가 되었습니다.
2.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제국 부흥의 야망
6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즉위와 함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제국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잃어버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여 로마의 재건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황제권 강화를 위한 강경한 정책과 전쟁을 위한 세금 증가는 시민들의 불만을 키웠고 이는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폭동으로 폭발했습니다.
이른바 니카의 반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유스티니아누스를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뻔한 위기였습니다. 시민들은 황제의 퇴위를 외치며 궁전으로 몰려왔고 도시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는 도망을 고려했지만 황후 테오도라는 “황제의 자주색 옷은 가장 고귀한 수의”라며 물러서지 말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녀의 강경한 태도는 상황을 반전시켰고 황제는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희생되었지만 황제권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권력을 재확립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편찬입니다. 이는 수백 년간 누적된 로마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법전으로 후대 서유럽 국가들의 법률 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또한 교회를 황제의 통제 아래 두어 종교적 통일을 유지하려 했으며 필요하다면 교황조차도 추방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비잔티움에서 정치와 종교가 얼마나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군사적으로도 유스티니아누스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과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차례로 멸망시키며 옛 서로마의 핵심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로써 지중해 세계는 다시 한 번 비잔티움의 영향권 아래 들어오는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제국의 위세는 웅장하게 재건된 성 소피아 성당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거대한 돔과 찬란한 모자이크는 신의 권위와 황제의 권력이 결합된 비잔티움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었습니다.
3. 비잔티움의 저력과 문화의 확산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혹독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된 직후, 아라비아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며 제국을 압박했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 북아프리카 등 가장 부유한 지역이 차례로 상실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여러 차례 포위당했습니다. 이 시기 비잔티움은 더 이상 팽창하는 제국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국가로 전락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여기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제국은 군사와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편하며 위기에 대응했습니다.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생계를 보장하는 제마 제도는 군사력과 농민 사회를 결합시킨 제도였습니다. 병사들은 자신의 땅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웠고 이는 방어 중심의 강한 군사 체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귀족과 수도원의 대토지 소유를 견제하며 농민층을 보호하려는 정책은 사회적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10세기 이후 비잔티움은 다시 한 번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불가리아 왕국을 정복하며 발칸반도에서 우위를 확보했고 동방으로는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압박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며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이 도시는 단순한 상업 도시를 넘어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로서 제국의 심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엇보다 비잔티움의 가장 큰 유산은 문화적 영향력이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비잔티움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과 전통을 보존한 유일한 문명국이었습니다. 이들은 교육과 문헌 정리를 통해 고전 문화를 계승했고 이를 이슬람 세계와 서유럽에 전파했습니다. 또한 비잔티움은 동유럽 슬라브족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며 문명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키예프 루스는 비잔티움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했고 훗날 비잔티움 멸망 이후에는 그 후계자를 자처하게 됩니다. 이처럼 비잔티움은 사라진 제국이지만, 그 문화와 영향력은 오랫동안 살아남았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단순히 오래 존속한 국가가 아니라 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편한 생존의 제국이었습니다. 군사 제도와 행정, 종교와 문화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비잔티움의 선택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천 년을 버틴 이 제국은 무너졌음에도 여전히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