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정치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제도와 권력을 설계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대한제국의 주권을 해체하고 식민 지배로 나아가는 길을 제도적으로 정비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와 정치 행보를 중심으로 그의 선택이 일본과 한국 역사에 남긴 의미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토 히로부미의 성장과 사상 전환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에도 시대 말기 조슈 번의 농민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사 계급이 지배하던 봉건 사회에서 그는 태생적으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위치에 있었으며 처음에는 정식 무사 신분조차 보장받지 못한 하층민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부친이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토 가문을 잇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최소한의 교육과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출신 배경은 훗날 그가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 국가를 지향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청소년기의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 번 내부에서 학문과 무예에 모두 밝은 인물로 평가받던 구리하라 료조의 눈에 띄어 학문적 지도를 받게 되었고 이후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던 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하며 시대적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흡수하였습니다. 쇼인은 존왕양이를 통해 막부의 무능과 외세의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급진적 사상을 제자들에게 주입하였고 이토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천황 중심의 질서 회복과 서구 배척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는 단순한 이론가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나섰으며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 가담하는 등 과격한 실천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특징은 이념에 고착되지 않고 현실을 통해 사고를 수정하는 데 있었습니다. 1863년 조슈 번의 지원으로 밀항에 가까운 형태로 영국 유학을 떠난 그는 산업과 과학, 군사와 행정 전반에서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선 서구 국가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서양을 배척하는 양이론은 더 이상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며 오히려 일본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멸적 사고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개국과 근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국가관을 확립합니다. 그는 외세를 무작정 거부하는 대신 서구의 제도와 기술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일본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사상 전환은 단순한 개인적 변화가 아니라 이후 그가 메이지 정부에서 수행한 모든 정책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게 됩니다.
2. 근대 일본 국가 체제의 설계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근대 국가로서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유민권운동이 확산되며 국회 개설과 국민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정부 수뇌부는 급격한 민주화가 국가 통합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입헌정체를 수용하되 천황권을 중심에 둔 강력한 국가 구조를 구축하는 방향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유럽 헌법 조사를 명목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장기간의 시찰을 진행하며 비스마르크 체제하의 독일 제국 헌법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독일식 헌법은 의회를 인정하면서도 행정부와 군주 권한이 강력하게 유지되는 국가주의적 모델이었으며 이는 일본의 천황제와 매우 잘 부합한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식 의회 중심의 자유주의 체제는 일본의 국체에 맞지 않는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대일본제국헌법은 외형상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천황에게 광범위한 통치권과 군 통수권을 부여하는 구조였습니다. 헌법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명시하였지만 동시에 법률에 의해 언제든 제한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을 국민 주권의 선언이 아니라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 기술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1885년 내각제 도입과 함께 초대 총리대신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관료제와 궁중 권력을 결합하여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하며 조약 개정, 산업 기반 확충, 청일 전쟁 수행 등 일본의 국력 신장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뒤에는 정당 정치 경시, 권력의 집중, 번벌 관료 중심의 폐쇄성이 함께 존재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설계한 국가 체제는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군국주의로 치닫는 구조적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3. 제국주의 정책의 최전선에서
정치 일선에서 점차 밀려난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주의 정책의 핵심 무대로 이동하게 됩니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국제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받았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 실행 책임자로서 대한제국 초대 통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통해 대한제국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이후 병합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스스로를 조선 병합에 신중한 온건파로 묘사하였고 실제로 즉각적인 병합보다는 단계적 지배를 선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대한제국의 자주적 정치 공간을 철저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으며 군사·외교·재정 전반에서 일본의 간섭을 제도화하였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 심각한 주권 침해와 저항 운동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09년 만주 문제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하얼빈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피식민지의 저항이 국제 무대에서 표출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근대 국가의 설계자로 추앙받았지만 한국에서는 국권 침탈의 책임자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 국가 체제의 설계자이자 제국주의 확장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능력과 제도 설계는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성취와 책임을 함께 바라보아야 할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