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동학농민운동

steadystep1 2026. 1. 19. 15:31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내부의 구조적 모순과 외세의 침략이 동시에 겹치며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에 나섰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억압받던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동학농민운동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동학농민운동

1.동학의 탄생과 농민 봉기의 사회적 배경

동학농민운동의 근본적인 사상적 토대는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핵심 교리로 삼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었으며 특히 세도 정치로 인해 고통받던 농민과 하층민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왕실과 일부 양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로 인해 국정은 문란해졌고 지방에서는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수탈했습니다. 농민들은 가뭄이나 흉년이 들어도 세금을 감면받지 못했고 각종 명목 없는 잡세와 부역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동학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억눌린 민중의 불만과 개혁 의지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동학을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되는 사상으로 인식했습니다. 정부는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고 강력한 탄압 정책을 펼쳤으며 결국 1864년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했습니다. 이는 동학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오히려 동학교도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학 조직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하며 농민층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농민들은 단순한 신앙 공동체를 넘어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잡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은 동학이 정치·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했고 농민들의 불만은 점점 누적되었습니다. 결국 동학 사상과 사회적 모순이 결합되면서 농민 봉기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2.제1차 봉기와 전주화약, 개혁을 향한 민중의 실험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인 무장 봉기로 발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였습니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만석보 공사를 빌미로 물세를 거두는 등 불법적인 수탈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 고부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고부 민란 이후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했으나 그는 오히려 농민들을 역적으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전봉준은 다시금 봉기를 결심하게 됩니다. 1894년 3월 전봉준은 손화중 등과 함께 수천 명의 농민군을 모아 제1차 봉기를 단행했습니다.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정읍,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등지를 연이어 점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군은 단순한 폭동 세력이 아니라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춘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구호로 내세우며 국가를 지키고 백성을 구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 정부는 결국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의 개입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외세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한 전봉준은 정부와 협상에 나섰고 1894년 5월 전주화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전주화약을 통해 농민군은 해산하는 대신 폐정개혁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라도 각지에는 집강소라는 농민 자치 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집강소는 치안 유지와 행정 운영을 담당하며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신분 차별을 완화하는 등 실제적인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민중이 직접 지역 사회를 운영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동학농민운동이 단순한 저항을 넘어 사회 개혁 실험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줍니다.

 

3.제2차 봉기와 실패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전주화약 이후에도 조선의 정세는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내정 간섭을 강화했으며 1894년 6월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감금했습니다. 이어 친일 내각을 수립하고 갑오개혁을 강행하면서 조선의 주권은 심각하게 침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동학농민군에게 또 다른 봉기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전봉준은 일본의 침략 행위를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김학진 등과 함께 제2차 봉기를 준비했습니다. 1894년 9월 삼례에서 다시 집결한 농민군은 항일을 목표로 서울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이 봉기는 전라도에 국한되지 않고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으로 확산되며 대규모 항일 무장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봉기는 이전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일본군은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반면 농민군은 열악한 무기와 훈련 부족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결국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세력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농민군은 급속히 와해되었고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비록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 운동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실제로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상당 부분은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습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은 3·1운동과 의병 운동 등 이후 민족 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패배한 혁명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음을 선언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정신과 의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봉건 질서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중이 스스로 변화를 요구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무력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평등과 자치, 개혁을 향한 농민들의 요구는 이후 한국 사회가 근대로 나아가는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오늘날까지도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일깨워주는 상징적인 운동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