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는 무력과 혁명이 당연시되던 20세기 초 세계사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흔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총칼 대신 자기 절제와 도덕적 책임을 앞세워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습니다. 간디의 생애와 사상은 독립운동의 성공담을 넘어 인간과 사회가 어떤 기준 위에서 변화해야 하는지를 끝없이 묻고 있습니다.

식민지 인도 청년에서 세계적 사상가로
마하트마 간디는 1869년 인도 서해안의 소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 배경은 특별히 혁명적이거나 급진적이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힌두 사회 속에서 성장한 그는 조혼이라는 관습에 따라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고 이는 훗날 욕망과 책임, 절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는 개인적 경험으로 남게 됩니다. 간디의 어린 시절은 인도의 수많은 평범한 소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열아홉 살이 된 간디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영국 유학은 식민지 엘리트로 편입되는 가장 확실한 통로였으며 많은 인도 청년들이 서구 문명을 동경하며 그 길을 택했습니다. 간디 역시 이너 템플 법과 대학에 진학하여 법률가로서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생활은 간디를 영국식 신사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인도인으로서의 자각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유와 법치의 본산이라 불리던 영국 사회에서도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차별과 경계를 경험하였습니다.
이 경험은 간디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법과 정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문명과 발전은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인도로 돌아왔으나, 곧 남아프리카로 건너가 인도인 상사의 고문 변호사로 일하게 됩니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됩니다. 남아프리카에서 간디는 흑인과 인도인들이 겪는 구조적 차별을 일상적으로 목격하였고 법과 제도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동하는 현실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특히 열차에서 1등석을 이용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쫓겨난 사건은 간디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분노했지만 그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으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간디는 바가바드기타를 반복해서 읽으며 자기 희생과 의무, 집착 없는 실천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또한 톨스토이와 러스킨의 사상은 간디에게 물질문명 비판과 도덕적 공동체라는 관점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 국민 회의를 조직하고 인두세 반대 운동을 지도하면서 사상과 실천이 결합된 지도자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 모든 경험은 훗날 인도 독립운동에서 나타나는 간디 사상의 토대가 되었으며 그를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세계적 사상가로 성장시키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폭력 없는 투쟁이라는 급진적 실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간디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영국은 인도인들이 전쟁에 협력하면 자치를 허용하겠다고 공언하였고, 간디는 이 약속을 도덕적 계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인도인들에게 분열을 극복하고 단합할 것을 호소하며 영국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며 식민 통치를 강화하였습니다.
이 배신은 인도 전역에 거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간디는 전 인도적 민족운동의 중심 인물로 부상합니다. 그는 기관지 Young India를 통해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였고 약소 민족의 자결권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간디는 영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하고 영국 상품 불매 운동과 국산품 애용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운동이 아니라 식민 지배에 대한 도덕적 거부 선언이었습니다.
간디 사상의 핵심은 아힘사, 즉 비폭력 무저항주의였습니다. 그는 폭력은 언제나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며 정의를 실현하기는커녕 증오의 윤회만을 반복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간디에게 비폭력은 약자의 체념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도덕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비폭력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극한의 자기 정화”라고 말하며 자기 통제와 책임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소금의 행진은 이러한 사상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소금이라는 일상적 물질을 통해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드러낸 이 행진은 수많은 인도인들을 비폭력 저항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총칼 하나 없이 제국의 권위를 흔든 이 사건은 세계사적으로도 전례 없는 저항 방식이었습니다. 간디의 개인적 삶 역시 그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였습니다. 그는 극도의 금욕과 절제 속에서 살았으며, 타 종교와 타인에 대해서는 깊은 관용을 유지하였습니다.
독립 이후의 비극과 간디 사상의 미완의 유산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독립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비극을 동반하였습니다. 힌두와 무슬림 간의 갈등은 대규모 유혈 사태로 이어졌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간디는 이러한 독립을 진정한 자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독립 기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종교 간 화해를 외치며 인도 전역을 돌았습니다.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힌두와 무슬림의 공존을 호소하던 간디는 돌을 맞으면서도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재는 점점 고립되었고 결국 1948년 1월 30일 힌두 극단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종교적 융합을 외친 인물이 종교적 증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인도 현대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로 남았습니다.
독립 이후 간디와 네루의 사상적 갈등은 분명해졌습니다. 네루는 공업화와 산업화를 통해 인도를 근대 국가로 만들고자 했으나 간디는 농촌 중심의 자치와 도덕적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간디에게 자치란 자기 억제와 책임의 실천이었으며, 민주주의는 폭력이 아닌 인간의 존엄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비록 간디의 이상은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후 인도가 겪은 정치적 폭력과 권력 집중의 역사는 그의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간디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성숙을, 힘보다 책임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