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라고 하면 보통 수개월에서 수년, 때로는 수십 년에 걸친 끔찍한 충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역사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19세기 말 동아프리카의 작은 제도국가에서 벌어진 전투는 불과 몇십 분 만에 끝났고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그 짧음 때문에 오히려 제국주의 시대의 폭력성과 불균형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잔지바르 전쟁은 1896년 영국과 잔지바르 사이에서 발생했으며 기록에 따라 38분에서 45분 사이 흔히 약 40분 만에 종결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사건은 한 편으로는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가 어떻게 정치적 결정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화 과정에서 벌어진 인간적 비극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게 된 복합적 배경, 전투의 실제 전개 양상, 그리고 그 결과가 남긴 역사적 의미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제국주의 경쟁과 잔지바르 내부 권력 다툼
전쟁의 불씨는 제국주의 경쟁과 잔지바르 내부의 권력 다툼에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은 제국주의의 전성기였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과 조약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잔지바르는 인도양 서부, 아프리카 동해안의 한 섬 왕국으로 향신료·상업·노예무역의 요충지라는 지리적·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유럽 열강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특히 영국은 인도 제국과의 해상로 보호 및 동아프리카 해안 통제 차원에서 잔지바르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보았고 19세기 중반 이후 사실상 영향권으로 두며 정치적 간섭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890년대에 들어 잔지바르는 명목상 술탄이 통치하는 독립국이었지만 실상은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자주권이 크게 제한된 보호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전통 귀족 세력, 상업을 장악한 아랍계 및 인도계 상인층 그리고 외세의 후원을 받는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었습니다. 1896년 술탄 하마드 빈 투와이니의 갑작스런 사망이 그러한 갈등을 표면화시켰습니다. 영국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계승자를 세우고 싶어 했고 반면 지역 내에서 권력을 노리던 칼리드 빈 바르가시는 영국의 승인 없이 스스로 권력을 선언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왕위 계승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지역 전략에 대한 도전이자 잔지바르 내부에서 자율성을 주장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선제적 개입과 무력 행사가 흔한 시기였고 영국은 제국의 위신과 향후 영향력 유지를 위해 단호한 대응을 택했습니다. 이미 1890년의 헬골란드-잔지바르 협정(영국과 독일 간의 협정으로 독일은 일부 아프리카 지역을 영국은 잔지바르 영향권을 인정받는 성격의 협정)이 체결된 현실도 배경으로 작용해 잔지바르에서의 영국 권위에 대한 도전은 곧 유럽 열강 간 약속과 패권 균형을 흔드는 사안으로 비화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결국 칼리드의 거부는 영국에 무력으로 즉시 응답할 명분과 동기를 제공했고 몇 시간 내로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해졌습니다.
2.전투의 전개와 현장의 참상
전투는 단 40분의 파괴로 끝이 났고 현장은 참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1896년 8월 27일 영국은 칼리드에게 궁전을 비우고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칼리드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궁전 주변에는 지역병사와 무장한 지지자들이 집결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성곽과 석조 건물이 있어 어느 정도 방어에 유리해 보였지만 문제는 군사 기술의 갭이었습니다. 잔지바르 측의 병력 대부분은 전근대적 무기와 장비에 의존했으며 대포의 화력 또한 현대 전함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반면 영국은 인도양에 정박 중이던 포격 능력을 갖춘 근대 전함 여러 척인 해군 전력을 신속히 동원했습니다.
포격은 약속된 기한이 지나자마자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정확하고 강력한 포격은 초반부터 결정적이었습니다. 궁전과 군사 요충지는 짧은 시간 내에 큰 피해를 입었고 잔지바르의 병력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기록에 따라 전투 지속 시간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8분에서 45분 사이로 집계되어 약 40분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잔지바르 쪽에서는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건물 파괴와 화재가 도시 일부를 휩쓸었습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고 물리적 전투는 빠르게 종결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직후 칼리드는 도망쳐 독일 영사관 등지로 피신했고 결국 영국이 지지하는 하무드 빈 모하메드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습니다. 전개 양상은 단순한 군사 충돌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현대적 화력과 해군력의 위력 그리고 정치적 의지가 결합될 때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가 순식간에 제압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또한 전투의 신속성과 효율성은 전쟁의 길이가 희생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수십 분 만에 수백 명이 사라지고 몇 권력자가 교체되는 일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3.전쟁이 남긴 결과와 여파
잔지바르 전쟁은 짧았지만 그 결과 여파는 길고 깊었습니다. 당장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영향력이 확고해졌습니다. 하무드 빈 모하메드는 영국의 실질적 지배 아래 통치했고 잔지바르는 곧바로 보호령 체제로 굳어졌습니다. 주민들은 외세의 직접적 개입 하에 행정과 경제의 많은 부분이 통제되는 현실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는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 의식과 비극적 기억을 남겼습니다. 잔지바르는 결국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영향권 속에 머물다가 이후 독립의 길을 걸었지만 당시의 충격은 지역 사회의 기억 속에 깊게 새겨졌습니다.
역사적 의미는 더 광범위합니다. 우선 잔지바르 전쟁은 군사력과 기술 격차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강압인 제국주의 시대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발포 한 번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냉혹한 효율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적 참상과 불평등을 동시에 드러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국제외교의 실무에서 힘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합니다. 영국은 단호한 무력시위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즉시 확보했고 제국 경쟁 구도에서 도전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기억적 차원에서의 영향도 큽니다. 오늘날 잔지바르 관광지의 아름다움 뒤에는 과거의 상흔이 자리합니다. 가장 짧은 전쟁이라는 수식어는 때로 흥미거리로 소비되기도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인간적 비극과 제국주의의 폭력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 사건을 흥미 위주로만 소비하는 태도는 쉽게 사실의 맥락을 지워 버립니다. 잔지바르 전쟁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길이가 아니라 전쟁이 남기는 결과와 구조적 불평등을 직시해야 합니다. 짧았던 분 초는 오래도록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았고 그 교훈은 오늘날 세계질서와 지역 갈등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